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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탑] 쿤밤

[쿤밤]이름과 이름

 

 

 

그는 제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싫어했다. 사람들은 이야기를 와전하길 좋아하고, 또 그 와전된 이야기를 마치 사실인 양 떠들어대길 좋아했다. 그는 아마 지금쯤 저 사람들의 이야기 속 쿤 아게로 아그니스는 추악한 사람일 것이라 생각했다. 와전된 이야기를 떠들던 사람들은 제 앞에서는 찍 소리도 내지 못 하였다. 단지 제가 가진 성 때문이었다.

 

.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제 이름이 낯설었다. 십여 년간 들어온 이름이지만, 이름에선 어딘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성인 쿤과 어머니에게서 받은 아그니스. 여덟 글자의 이름 중 온전한 그의 이름은 아게로 세 글자뿐이었다. 그는 그저 온전한 제 이름으로 불리길 원했다.

 

아게로.

 

사과를 받았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또 미안하다고. ? 어째서 당신이 나한테 미안한 건데? 내가 저지른 일인걸. 나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최선의 길만을 걸어가야 해. 귀를 기울이지 않을 거야. 아무것도 믿지 않을 거야. 설령 당신이 나의-

어머니이더라도.

 

아그니스.

 

쿤 아게로 아그니스는 자신의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니 온통 에드안과 그의 전 부인 이야기로 가득했다. 외도. 이혼. 자살. 그리고 남겨진 아게로. 아무것도 물지 않은 입에서 단 맛이 느껴졌다. 틀었던 텔레비전을 도로 꺼버리니 까매진 화면에 비친 제 모습이 썩 초라해보였다.

 

슬프지 않았다. 그래서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들의 울음소리와 섞여 들려오는 조문객의 웃음소리. 가운데에 서서 눈물도, 웃음도 짓지 않는 쿤을 보며 사람들은 충격을 많이 받았구나. 하고 혀를 차며 지나갔다. 의미 없는 위로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릴없이 징징거리며 진동을 울려대던 휴대전화의 화면이 초록색으로 밝아졌다. 매니저인 이수의 연락이었다. 전화를 받기 위해 뻗은 손이 전화기에 닿자 어디서 지켜보기라도 한 듯 전화가 끊겼다. 휴대전화를 집어 잠금을 풀자 멈추었던 진동이 짧게 한 번 울렸다.

 

- 시간 나면 회사로 와. 이제 일 시작해야지.

 

? 지금 상황에 들어올 일이 있나? 부스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쿤은 이내 나갈 준비를 했다.

 

항상 사람이 많이 몰려있던 회사 앞에 웬일인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차에서 내려 회사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조용했다. 다만 입구 한 쪽에는 국화가 한 무더기 놓여있었고, 기다리던 사람들은 대부분 저를 향해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람을 보러 왔으면 웃던가, 소리를 지르던가 할 것이지. 그것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과 같은 눈빛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왔어?”

오라고 했잖아.”

크크.. 그래.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

들어온 거 보고.”

사실 들어온 지 꽤 지났어. 이것저것 일이 많아서 이제야 보여주네. 괜찮은 건 두 개야.”

 

매니저인 이수는 그가 어릴 적부터 함께해온 사람이라 쿤을 어려워하지 않았고 쿤 역시 이수와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쿤에게 들어온 시나리오들은 대부분 이수의 선에서 잘라내어 멀쩡한 것들만 쿤에게 보여줬고, 쿤은 자신의 스케줄에 맞추어본 후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를 골랐다.

 

나한테 뭐가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너야 뭘 하든 잘 어울리지 않겠냐.”

그건 알고 있어.”

...... 처음에 읽은 대본이 더 좋은 것 같은데, 어때?”

그래, 그럼. 그걸로 할게. 상대역은?”

그 누구더라. 있잖아, 신인 중에.. 맞아. 스물다섯번째 밤. 알지?”

모르는데.”

요즘 유명한 애 있어. 그리고 제작사에서 이름은 네 이름 그대로 하고 싶다는데 어때?”

다시 확인해보니 제게 부탁한 역할의 이름이 나오는 부분에는 - 으로 표기되어있었다. 썩 좋아하는 이름은 아니지만 연기니까 상관없을 거라는 생각을 한 채 대답했다.

그래.”

 

회사 건물 앞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진 않았지만 회사로 들어갈 때의 표정들을 또다시 보고 싶진 않았던 쿤은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 검은 벤에 올랐다. 쿤은 집으로 가는 길에 방금 본 시나리오의 상대역을 맡은 신인에 대한 정보도 좀 볼 겸 웹 사이트를 열었다. 실시간 검색어에는 여전히 제 부모가 올라있었다.

 

웹사이트에 떠있는 제 부모들의 기사를 애써 외면한 쿤은 검색창에 스물다섯번째 밤을 검색했다.

 

, 이게 뭐야.”

?”

나이, 생일, 소속사 정보도 없고 출연작은 하나야. 그것도 일회성 출연으로 5. 이런 애가 요즘 유명하다고?”

걔 팬 카페 들어가 봐.”

 

이수의 말을 듣고 들어가니 회원 수가 만 명이 넘는 카페가 나왔다. 오 분 출연하고 팬이 만 명이라니. 시기도 어지간히 잘 탔다고 생각하며 카페의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쿤은 이내 밤의 사진을 모아둔 게시글을 눌러보았다.

 

얼굴은 귀엽게 생겼네.”

그래. 너 배우 하유리 알지? 그 사람이 잘 생겼다고 SNS에 올렸다나봐. 그래서 사람들이 찾아보다 유명해진 것 같아.”

 

하유리라면 같은 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는 배우였다. 성격도 취향도 어느 것 하나 맞지 않아 마주치기만 하면 싸워댔지만, 비슷한 나잇대의 배우 중에선 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SNS에 올렸다니, 파급력이 클 만도 했다.

 

그래서, 내가 얘랑 합을 맞춰야 한다는 거지?”

그래.”

 

쿤은 한숨을 쉬며 웹 사이트를 닫았다. , 연기는 그런대로 하겠지.

 

 

 

그럭저럭 며칠이 지나고 대본 리딩 당일이 찾아왔다. 주조연급 배우들이 모두 모이는 첫 공식 일정이었다. 대본 리딩이 잡혀있는 건물 근처에 다다르니 기자들이 앞에서 어슬렁대고 있었다. 아마 아래에 서 있다가 뭐라도 정보를 받아가려는 계획일 것이다. 차에서 내린 쿤은 기자들을 못 본 척 지나쳐 그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뒤로 머쓱해하는 기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두어 개의 문이 보였다. 모두 같은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촬영에 응하는 배우들이 적은 편이 아니기에 큰 방을 잡은 것 같았다. 방 안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쿤에게 쏠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 데뷔를 한 쿤은 이미 데뷔를 한 지 10년이 넘어가는, 선배 축에 속하는 배우였다. 쿤은 대충 고개를 까딱인 뒤 주연배우의 자리로 가 앉았다.

 

대본 리딩을 시작하니 웅성거리던 현장의 분위기가 단숨에 바뀌었다. 가벼운 듯 묵직한 공기가 흘렀다. 리딩은 물 흐르듯 단숨에 진행되었다. 몇 번의 장면 전환이 이어지고, 이내 밤의 대사가 있는 장면이 되었다.

 

당신들.. 호량 씨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 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했던 얼굴이 차갑게 굳어가며 대사를 이어갔다. 목소리에 어느 정도 냉기가 흘렀다. 제 생각보다 연기를 잘 하는 것 같았다. 쿤은 밤이 리딩을 하는 동안 밤의 연기를 살폈다. 리딩이라 가볍게 목소리로만 연기를 하면 되었지만 표정까지 구겨가며 열심히 연기를 하는 모습이 어딘가 새로웠다.

 

리딩은 끝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예정되었던 시간보다 한 시간은 빨리 종료되었다. 대본들을 정리하고 있던 중, 감독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연 배우 두 명, 둘이 왜 이렇게 뻣뻣하게 있어? 본 촬영 들어거기 전까지라도 어서 친해져야지. 어디보자. 소개는 했고?”

아니요, 아직.”

그런 건 빨리 해야지! 어서 서로 소개해! 말도 놓고. 크크..”

“....쿤 아게로 아그니스야. 편하게 불러.”

스물다섯번째 밤입니다.”

아이고, 밤은 아직 말 안 놓네. 차차 놓으면 되겠지 뭐. . 난 잠시 가봐야겠네. 둘이 얘기 하고 있어!!”

 

감독은 시끄럽고 불편했다. 평소에도 오지랖이 넓어 쿤이 별로 좋아하지 않던 감독이었다. 막무가내로 시키고선 혼자 가버리네. 아직 리딩밖에 하지 않았지만 시작도 하지 않은 촬영이 벌써부터 막막하게 느껴졌다. 앞에 서있는 스물다섯번째 밤의 시선이 느껴졌다.

 

진짜 편하게 불러도 돼. 난 밤이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 , .”

, 알아?”

작품 몇 개 봤어요.”

그래? 그럼 뭐. 소개 할 것도 없겠네.”

 

별로 할 말도 없어 시답잖은 대화만이 오갔다. 소개해봤자, 이런 걸로 친해지긴 뭘 친해지겠어. 쿤은 밤에게 먼저 가보겠다는 말을 남긴 채 챙기던 대본을 마저 챙겨 방 밖으로 나갔다.

 

 

집으로 돌아온 쿤은 소파에 앉아 밤의 출연작을 찾아 틀었다. 5분정도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리딩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다. 연기가 인상 깊었다고나 할까, 쿤은 밤이 리딩을 할 때의 모습을 반복해서 떠올렸다.

 

 

-

 

 

첫 촬영이 시작되었다. 첫 씬은 밤과 조연이 대화를 하는 장면이었다. 3분가량 되는 장면을 찍기 위해 수많은 스태프들이 한참을 분주하게 움직였고, 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촬영이 시작되었다. 밤과 조연의 대사 이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오케이~ 밤 연기 잘 한다?”

감사합니다!”

 

카메라 뒤편에서 지켜보던 쿤도 고개를 끄덕였다. 밤의 본 성격은 밝은 것 같은데 무뚝뚝하고 딱딱한 성격의 캐릭터를 잘 소화해내었다. 같은 세트를 써서 촬영해야 하는 몇 씬을 더 찍은 뒤 다음 씬을 찍어야 했기에 쿤과 밤은 잠시 대기를 해야 했다. 아무래도 주연 배우 둘이기에 대기실도 붙어있고, 자리도 붙어있었기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쿤이 밤에게 어쩌다 연기를 하게 되었냐고 물었다.

 

친구를 따라서 하게 되었어요. 저기 지금 촬영 중인 여자애가 제 친구예요.”

쿤은 어머니의 여파로 자연스럽게 아역배우부터 시작을 했기에 밤이 어쩌다 연기를 시작했는지 궁금했지만, 친구를 따라 연기를 시작했단 소리를 듣고는 밤도 시작은 저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씬 준비해주세요!”

 

세트 촬영이 끝난 것 같았다. 둘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다음 촬영에 임했다.

 

 

돌아가던 카메라가 멈추었다. 첫 촬영이 순조롭게 끝났다. 영화 초반, 쿤은 밤에 비해 많이 나오지 않지만 오늘 촬영한 씬들 모두 NG없이 촬영하였다. 감독이 다가와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듣지 않았다. 피곤한 하루였다.

 

 

 

세 번째 촬영이 있기 하루 전이었다, 감독은 아직도 쿤과 밤이 한 화면에 잡히면 어색하다며 식사라도 하는 건 어떠냐고 권유했다. 지금까지 상대 배우와 단 둘이 식사를 한 적은 없었는데, 감독이 이번 영화에선 유독 쿤과 밤을 붙여두기 위해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촬영이 있기 전날, 둘은 저녁 식사를 위해 만났다. 테이블 위에서 오가는 소리라곤 접시에 포크가 부딪히는 소리뿐이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세 번째 촬영을 한 뒤 감독은 어색한 게 조금 나아졌다며 기뻐했다.

 

 

 

영화 촬영을 진행하는 동안 계절이 두 번 바뀌었고, 촬영은 막바지를 향했다. 야와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몇 달간 촬영하며 붙어 다니다 보니 쿤과 밤에게서 어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사 없이 그냥 길을 걷는 둘을 촬영하는 장면이었다.

감독은 이번 촬영으로 야외 씬은 끝이고 대사도 없으니 한 번에 찍고 들어가자며 이야기했고, 그런 감독의 말이 끝나자 촬영이 시작되었다.

! 오케이! 들어가자!”

장비를 챙기는 스태프들과 천천히 세트장 안으로 들어가는 배우들을 따라 쿤이 세트장을 들어가려 하자 하나둘 눈이 내렸다.

쿤 씨!”

뒤따라오던 밤이 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항상 듣던 제 이름이지만, 어딘가 기분이 좋아지는 이름이었다.

.”

 

 

 

 

2017.11.25. 뭐야? 그 허접한 파티는?  

2017.11.29. AA, HAPPY 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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